최홍만 "링에 서니 눈앞이 캄캄..한국선 경기 안 뛰겠다"..패배 뒤엔 마음의 병 있었다
출처:일간스포츠|2019-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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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계속 혼자 끙끙 앓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 것 같더라고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고민 끝에 연락했습니다."

지난 10일 오후 11시 수화기 넘어로 들려오는 종합격투기선수 최홍만(39)의 목소리에는 떨림과 한숨이 섞여 있었다. 1년 7개월 만에 국내 복귀전을 치른 지 1시간 이상 지났지만, 여전히 패배의 아쉬움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최홍만을 알고 지낸 수년 동안 그에게 먼저 전화를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최홍만은 "이제 한국에서 (경기를) 그만해야 할 것 같다"며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라는 충격적인 말로 경기 소감을 대신했다.

최홍만은 이날 서울 화곡동 KBS아레나홀에서 열린 엔젤스파이팅 챔피언십(AFC) 12 무제한급 입식 스페셜 매치에서 다비드 미하일로프(24·헝가리)에게 1라운드 49초 만에 KO패했다. 키 220cm(150kg)의 최홍만은 자신보다 체격 차가 현격한 미하일로프(195cm·110kg)를 맞아 신체적 이점을 활용하기 위해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경기 시작부터 미하일로프의 소나기 펀치를 허용하며 그대로 쓰러졌다. 심판은 10까지 카운트했지만, 최홍만은 일어서지 못했다. 전날 계체량에서 자신했던 화끈한 경기력과는 정반대 결과였다. 최홍만은 2017년 11월 AFC 05 대회 입식 격투기 무제한급 경기에서 우치다 노보루(일본)에게 심판 전원 일치 판정승을 거둔 뒤 승리가 없다.

최홍만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욕할 수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며 살았는데, ‘내가 죽을 죄를 짓기라도 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면서도 "이번만큼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리고 싶다. 경기에 져서 부끄럽거나 속상해서 핑계를 대는 건 절대 아니다"라고 말했다.



- 경기 결과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이번 경기만큼은 자신 있었다. 철저하게 준비했고, 컨디션도 무척 좋았다. 오랜만에 한국 팬들 앞에서 멋진 경기를 보여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결과는 1분도 채 버티지 못한 허무한 패배였다.
"링 위에 오르니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고, 앞이 잘 안 보이더라. 두려움이 몰려오면서 순간적으로 집중력을 잃고 움츠러들었다. 상대의 펀치 횟수나 강도는 문제가 아니었다."

- 몸상태에 문제였나. "정확히 말하면 멘틀이다. 사회공포증(대인기피증)이다. 오랜 세월 사람들한테 치이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긴장감과 스트레스가 쌓여 병이 됐더라. 수년 전부터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불명증도 심하다. 일찍 잠자리에 누워도 새벽이 돼야 잘 수 있다. 이번 시합을 준비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해외에서 경기할 때는 외국 관중이 대부분이었고,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상대적으로 편했다. 그런데 오늘 링에 오르는데 팬들 얼굴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았다. 여태껏 드러난 증세 중 가장 심한 상태를 경험했다."

- 일부 네티즌의 악성 댓글 때문인가. "어차피 댓글은 잘 보지 않는다. 우연히 보게 되도 이제는 댓글 자체만으로는 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다만 언젠가부터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힘들다. 자극적인 기사를 생산하는 언론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내가 천하장사로 씨름판을 흔들고 격투기선수로 전향해 화려했던 시절만 기억한다. 이해되는 부분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아쉽고 속상하다. 2010년 이후 전성기에서 내려왔지만, 열심히 하는 내 모습도 받아 주면 좋겠다. 팬과 언론이 한 번이라도 좋은 모습을 봐줄 순 없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너무 일방적이다. 내가 죽을 만큼 잘못한 건 아니지 않나. 또 부모님은 무슨 죄가 있나.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스트레스는 무척 크다. 보이는 게 다는 아닌데…. "



- 일본에서 훈련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인가. "내가 일본이나 해외에서 지내는 이유는 말 그대로 ‘살기 위해서‘다. 적어도 외국에선 한국에 있을 때보다 따가운 시선과 차가운 평가를 받지 않으니까. 한국에 있으면 병세가 깊어질 거라고 판단했다. 살아 있어야 좋은 날도 볼 수 있지 않나. 이런 이유로 국내에서는 경기하기 힘들다는 결론을 내렸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상태가 호전될 때까지는 해외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 가겠다."
- 지금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부모님이다. 어머니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나셨다. 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니에게 아들이 이기는 모습을 꼭 보여 드리고 싶었다. 편찮으신 아버지는 그 누구보다 아들의 승리를 바랐다. 경기를 보기 위해 본가가 있는 제주도에서 서울까지 오시려는 걸 말렸는데…. 어떻게든 이기는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었다."

- 일부 전문가는 정신력보다 훈련 부족을 패인으로 지적한다. "올해 들어 어딘가 놀러가 본 기억이 없다. 지난 2월부터 시합을 위해 국내외를 오가며 본격적으로 운동에 매진했다. 예능 프로의 출연 섭외가 쏟아지는 가운데 방송 출연 한 번 하지 않았다. 자제하고 또 자제했다."



- 이번 경기를 위한 훈련 기간과 운동량은. "살아남고 싶었다. 훈련 파트너와 코칭스태프와 동고동락하며 준비했다. 자고 먹는 시간 외엔 다 운동에 투자했다. 말 그대로 체육관에서 눈을 뜨고 눈을 감았다. 정말 열심히 했다는 말밖에 할 수 없다. 체급이 비슷한 상대를 찾아 충분한 스파링으로 실전 감각도 유지했다."

- 일부에서는 한물갔다는 지적도 있다.
"나는 씨름선수 출신이고, 격투기 경력까지 합하면 평생을 운동선수로 살았다. 내 몸은 내가 가장 잘 안다. 체력과 신체 능력은 아직 문제가 없다. 다만 자신감을 회복하고 링 위에서 당당하게 싸울 수 있도록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게 필요하다. 짧은 기간 안에 치료할 수는 없다. 자신과 싸움이다."

- 훈련 기간 중 중국·일본 대회에 참가한 게 논란이 됐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중소 격투기 단체들의 부탁이었다. 격투기의 붐업을 위해 나와 달라고 했다. 출전을 수차례 고사하다가 격투기계를 돕자는 마음으로 수락했다."

- 좋은 취지로 출전했다고 하지만, 체급이 한참 낮은 선수에게 패한 건 어떻게 설명하나.
"막상 내가 출전을 확정하니 대회사들도 욕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말도 안 되게 체격 차가 나는 상대를 붙였다. 큰 선수와 작은 선수의 대결 구도를 만들어 흥행몰이를 하겠다는 의도였다. 뒤늦게 알았지만, 싸우는 것 자체도 흥행을 위한 일종의 쇼라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그냥 서 있다가 링에서 내려왔다는 말을 들으니 속상했다. 게다가 판정으로 지는 일이 나오니, 나를 응원해 주는 한국 팬들은 속상한 마음일 거라는 점은 이해한다."

- 돈을 벌기 위해 ‘묻지 마(대회를 가리지 않고)‘ 출전을 한 건 아닌가. "돈 때문이었다면 굳이 한국에서 경기할 필요가 없다. 돈을 많이 주겠다는 해외 단체만 골라서 출전하면 된다. 한국에서 받는 파이트머니(대전료)와 해외에서 제시하는 계약금이나 파이트머니는 큰 차이가 있다. 지금도 최고 대우를 해 주겠다는 해외 단체가 여럿 있다. 아니면 독하게 마음먹고 모든 대회를 다 뛸 수도 있다. 돈이 문제는 아니다."



- 경기력 부진 속에 마음의 상처까지 받았는 데도 포기하지 않는 건 인상적이다. "격투기는 그만둘 수 없다. 오래 한 것도 있지만, 억울해서 더 그러지 못한다. 지금까지 겪은 힘든 시간에 대한 보상을 받고 말 테다. 보란 듯 재기해서 나를 기다려 준 사람들에게 보답하겠다."

- 앞으로 계획은. "오랜 기간 준비한 시합이 아쉽게 끝나 일단은 마음을 추스려야 한다. 전성기 시절 최홍만을 다시 한 번 보여 드리는 게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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