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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 위의 독재자’ 아돌프 럽
출처:점프볼|2015-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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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글로리 로드(Glory Road)」에서 주인공 돈 해스킨스 감독과 최후의 일전을 벌였던 상대팀 켄티키 대학의 적장은 아돌프 럽이었다. 흑인 5명으로 구성된 텍사스 웨스턴 대학을 상대로 백인 우월주의자였던 럽이 악역이었던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가 넘을 수 없었던 명장이었기에 영화의 재미는 배가되었다.

※본 기사는 농구전문잡지 점프볼 9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켄티키 대학은 조 B. 홀, 에디 서튼, 릭 피티노, 터비 스미스, 존 캘리퍼리 등 수많은 명장들과 함께 NCAA 토너먼트 통산 8번의 우승을 차지한 대학 최고 명문이다. 물론 NCAA 토너먼트 우승 횟수는 11번 우승한 UCLA에 밀리지만, UCLA 우승 중 10번이 1960, 70년대에 집중된 반면 켄터키 대학은 1940년대부터 가장 최근에는 2012년까지 넓게 펼쳐져 있고 우승 감독도 5명이나 되기 때문에 진정한 명가라 할 수 있다. 이런 명가 켄티키 대학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감독을 단 한 명 꼽으라면 단연 아돌프 럽이다. 23,500명을 수용하는 켄티키 대학의 홈구장 명칭도 그의 이름을 따 ‘럽 아레나’로 불릴 정도다.

왜 그가 최고의 감독인가

NCAA 역사상 최고의 명장을 꼽을 때 아돌프 럽이 빠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럽은 이미 명장열전에서 소개했던 마이크 슈셉스키, 딘 스미스, 존 우든, 밥 나이트, 포그 앨런 등과 같은 명장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을 만큼의 업적을 쌓았기 때문이다. 1930년부터 1972년까지 켄터키 대학의 지휘봉을 잡았던 럽은 통산 876승 190패(.822)라는 어마어마한 성적과 NCAA 토너먼트 우승 4회, NIT 우승 1회 등 그 누구에게도 손색없는 성과를 남겼다. 또, 통산 최다승으로는 슈셉스키(1,018승), 나이트(902승), 스미스(879승)에 이어 4위에 올라있고 통산 승률은 클레어 비(.822)에 이어 2위다. NCAA 토너먼트 우승도 우든(10회), 슈셉스키(5회)에 이어 역대 3위에 랭크되어 있다. NCAA 토너먼트에서 2연패를 한 감독도 헨리 아이바(1945년, 1946년/ 오클라호마 농대), 필 울퍼트(1955년, 1956년/ 샌프란시스코 대학), 에드 주커(1961년, 62/ 신시내티 대학), 존 우든(1964년, 1965년, 1967~1973년/ UCLA), 마이크 슈셉스키(1991년, 1992년/ 듀크 대학), 빌리 도너번(2006년, 2007년/ 플로리다 대학) 등 럽까지 단 7명밖에 되지 않는다. 사우스이스턴 컨퍼런스(이하 SEC)에서도 럽은 27번의 우승과 13번의 SEC 토너먼트 우승을 차지하는 등 켄터키 대학을 남부 지역 최강자로 올려놓았다. 켄터키 대학은 럽이 재임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승률 5할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또한 럽은 랠프 비어드, 알렉스 그로자, 클리프 헤이건, 댄 이슬, 팻 라일리, 에이드리언 스미스, 프랭크 램지 등 수많은 선수들을 NBA에 진출시켰다. 밥 브래넘(노위치 대학 등), 팻 라일리(LA 레이커스, 뉴욕 닉스 등), 댄 이슬(덴버 너게츠), 조 B. 홀(켄터키 대학) 등 명장들도 럽의 제자였다. 그의 제자 중 헤이건, 램지, 라일리는 네이스미스 기념 농구 명예의 전당에도 스승 럽과 함께 이름을 올리고 있다. 따라서 럽은 성적이나 우승 회수, 그가 배출한 선수, 감독 등을 고려할 때 농구 역사상 가장 훌륭한 명장 중 하나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스승을 넘다

아돌프 프레드릭 럽은 1901년 캔자스 주(州) 할스테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오스트리아인, 어머니는 독일인으로 럽이 태어나기 전에 캔자스로 이민을 왔다. 럽이 농구에 관심을 처음 가진 것은 6살 때였다. 그가 살던 할스테드 고등학교가 주 챔피언에 오르는 모습을 보며 농구에 빠지게 된 것. 이후 럽은 할스테드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키가 188cm까지 자라며 졸업반 때는 주장으로 맹활약했다.

1919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럽은 캔자스 대학에 입학했다. 당시 캔자스 대학에는 명장 포그 앨런(8월호 명장열전 참조)이 농구팀을 이끌고 있었다. 비록 럽은 걸출한 동료들에 밀려 벤치에서 출전하곤 했지만, 명장 앨런의 코칭 방식을 벤치에서 가까지 보면서 감독으로 역량을 조금씩 키워나갈 수 있었다. 1922년과 1923년 켄터키 대학은 2시즌 도합 33승 3패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며 향후 헬름 재단에서 선정한 전미 챔피언(당시는 NCAA 토너먼트가 없었음)으로 꼽혔다. 캔자스 대학을 졸업한 럽은 교사로 몇몇 학교를 전전했다. 그러던 중 1926년 일리노이 프리포트에 위치한 프리포트 고등학교의 역사·경제 교사 겸 농구 감독으로 임용되었다. 럽은 당시 인연을 맺은 일리노이 대학의 크레익 루비 감독의 추천으로 1930년 켄터키 대학의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그리고 럽과 켄터키 대학의 운명은 180도 달라진다.

사실, 럽이 부임하기 전부터 켄터키 대학은 명가였다. 1920-1921 올아메리칸 시즌에 바질 하이든을 앞세워 13승 1패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며 SIAAC(Southern Intercollegiate Athletic Association Conference) 우승을 차지했고 존 마우어 감독 시절에도 상당한 성적을 남기곤 했다. 하지만 켄터키 대학의 역사는 럽 이전과 럽 이후로 나눠도 무방할 정도로 럽이 남긴 업적이 어마어마했다.

럽의 농구 철학은 스승인 앨런의 철학을 계승발전 시킨 것이었다. 럽하면 가장 떠오르는 전술은 속공이다. 빠른 속공으로 켄터키 대학을 정상으로 이끌었다. 또한 정교하고 빠른 패스 역시 중시했다. 럽이 속공을 주무기로 삼는 것은 앨런과 흡사했고 이후 다양한 세트 플레이(10~15개 정도를 사용 사용)하는 것은 앨런과 달랐다. 또한 럽은 1930년대에 ‘가드 어라운드’ 플레이와 인사이드 스크린 플레이를 고안해 초창기 농구의 혁신가로 불리곤 했다. 수비에서는 타이트 맨투맨 디펜스를 선호했고, 30년 가까이 지역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1963-1964시즌 이후에는 1-3-1 지역방어를 구사하며 트랩 디펜스를 선보이기도 했지만 스승인 앨런과 마찬가지로 맨투맨 디펜스의 신봉자였다.

럽은 공격과 수비에서 모두 기본기를 강조했고 반복 연습을 강조했다. 또한 선수들에게는 가혹하고 독재자 스타일이었다. 선수들이 실수를 하면 가차 없이 질타했고 심지어 선수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드는 폭언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럽은 이런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과 신념으로 스승인 포그 앨런이 기록했던 통산 746승을 넘어섰고 1998년 자신의 후배 딘 스미스가 깨기 전까지 NCAA 역대 최다승 기록인 876승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남겼다.

블루그래스의 남작

럽은 감독 재임기간 동안 여러 가지 별명을 얻었다. 그 중에는 ‘갈색 정장의 사나이(The Man in the Brown Suit)’도 있었는데 이는 그가 진한 갈색 정장을 즐겨 입었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또 다른 별명은 ‘블루그래스의 남작(Baron of the Bluegrass)’이다. 블루그래스는 켄터키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또한 배론 켄터키 블루그래스는 골프에서 많이 사용하는 잔디의 일종이기도 하다. ‘남작’이라는 별명은 선수들에게 독재자와도 같았던 럽에게 잘 어울리기도.

럽은 수많은 스타들을 배출했고 수많은 최강 라인업을 구축했다. 그중 단연 최고로 꼽히는 팀은 소위 ‘패뷸러스 파이브(Fabulous Five)’라 불렸던 NCAA 토너먼트 2연패를 달성했던 1948~1949년 팀들이다. 알렉스 그로자(201cm), 랠프 비어드(178cm)라는 막강 원투펀치에 2차 대전에 참전했던 클리프 베이커(185cm), 켄 롤린스(183cm), 미식축구 와이드리시버로 운동능력이 탁월한 월러스 ‘와와’ 존스(193cm)까지 화려한 멤버들을 자랑한 켄터키 대학은 두 시즌 동안 68승 5패에 SEC 경기 22전 전승을 거두는 등 압도적인 전력을 자랑하며 럽 감독에게 첫 번째 NCAA 토너먼트 우승 트로피를 안겼다. 1992년과 1993년 NCAA 토너먼트에서 2년 연속 준우승을 차지한 미시건 대학을 ‘팹 파이브(Fab Five)’라고 줄여 부르는 것도 이들과 구분하기 위해서다.

1951년 NCAA 우승을 차지했던 멤버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에게는 특별한 별명은 없었지만 위력은 패뷸러스 파이브 이상이었다. 213cm의 장신 센터 빌 스파이비와 ‘훅슛의 달인’ 클리프 헤이건(193cm), 향후 보스턴 셀틱스에서 NBA의 원조 식스맨으로 활약하는 프랭크 램지(191cm) 등이 포진한 당시 켄터키 대학은 32승 2패를 기록했고 NCAA 토너먼트에서 캔사스 주립대학을 68-58으로 잡고 통산 3번째 정상을 밟았다. 

‘피들린 파이브(Fiddlin’ Five)’도 빼놓을 수 없다. ‘피들린 파이브’는 1958년 NCAA 토너먼트 결승전에서 엘진 베일러가 버틴 시애틀 대학을 84-72로 통산 4번째 정상에 올랐다. 버논 해튼(191cm), 존 크리글러(191cm), 존 콕스(193cm), 에드 벡(201cm), 에이드리언 스미스(183cm)로 구성된 당시 켄터키 대학이 우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전문가는 없었다. 아니 럽 자신도 이들이 우승을 할 것이라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피들린 파이브’는 정규 시즌 6패를 안고도 우승을 차지하며 당시까지 최다패를 기록한 우승팀이 되었다.

영화 「글로리 로드」에서 악역이 되었던 1965-1966시즌 켄터키 대학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강팀이었다. 당시 켄터키 대학은 주전 5명이 모두 흑인으로 구성된 텍사스 웨스턴 대학(현 UTEP)에게 65-72로 패해 준우승에 그친 바 있다. 하지만 당시 켄터키 대학 선수들은 신장 196cm 이상이 아무도 없는 단신 선수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압박 수비와 빠른 업템포 농구로 정규 시즌 27승 2패(2패 중 1패가 바로 결승에서 당한 패배)로 AP와 UPI 폴에서 모두 전미 1위를 차지했다. 당시 켄터키 대학에는 두 명의 ‘올-아메리칸’ 루이 댐피어(183cm), 팻 라일리(193cm)와 테드 재러츠(196cm), 타미 크론(196cm), 래리 콘리(191cm) 등 작지만 빠른 선수들이 주축이었다. 키가 작고 외소한 사람이라는 뜻의 ‘런트’가 별명으로 붙어 ‘럽스 런츠(Rupp’s Runts)’라 불린 당시 켄터키 대학은 당시 어시스턴트 코치였던 조 B. 홀이 만든 오프시즌 컨디셔닝 프로그램을 통해 완벽한 몸상태를 유지했다. 또한 훌륭한 벤치멤버들 덕에 업템포 농구로 체력전을 펼칠 수 있었다. 또한 슛과 패스, 수비력이 강력해 럽 감독에게 가장 사랑받는 팀이었고 켄터키 대학 팬들도 가장 좋아하는 팀이었다.

최강의 팀 뒤에 숨은 사연

일부 전문가들이 꼽는 럽 감독의 최강의 팀은 1953-1954시즌 팀이다. 실제 헬름 재단은 향후 1954년 챔피언으로 25승 무패를 기록한 켄터키 대학을 선정한 바 있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1951년 NCAA는 1949년 NIT(National Invitational Tournament)에서 열린 켄터키 대학과 로욜라 대학의 경기에서 승부 조작이 이뤄졌음을 발표했다. 켄터키 대학 소속이던 알렉스 그로자, 랠프 비어드, 데일 반스테이블이 도박사들로부터 돈을 받고 승부를 조작한 것이다. 당사자들도 이를 인정하면서 법적인 처벌을 받았고, NBA에서도 추방되었다. 켄터키 대학에도 불똥이 튀었다. 1시즌(1952-1953시즌) 동안 공식전에 나설 수 없다는 출장정지 징계를 받았다. 

선배들의 잘못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하게 됐지만, 행운아닌 행운도 따랐다. 출장정지 덕분에 클리프 헤이건, 프랭크 램지, 루 시오로폴로스(196cm) 등 4학년들은 1년 더 남아 1953-1954 시즌을 뛸 수 있었다. 덕분에 라인업이 더 강해졌다. 켄터키 대학은 경기당 24득점을 올린 헤이건과 19.6득점을 올린 램지, 14.5득점을 기록한 시오로폴로스를 앞세워 25승 무패로 다시 SEC 챔피언에 올랐다. 

하지만 이 시즌 켄터키 대학의 전적은 여기서 마침표가 찍혔다. NCAA 토너먼트에 나가지 않은 것이다. 사연이 있었다. 4학년 헤이건, 램지, 시오폴로스는 NCAA 토너먼트가 열리기 직전에 학위를 취득하면서 NCAA 토너먼트에 출전하지 못하게 됐다. 이들이 토너먼트에서 뛸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고의로 F 학점을 받아 학위 취득을 미루는 것뿐이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켄터키 대학은 선수단 투표 끝에 4학년 없이는 토너먼트도 나가지 않겠다며 출전권을 반납했다. 만약 토너먼트까지 출전했다면 ‘역대 최고’라는 평가는 좀 더 굳건해지지 않았을까?

럽에 관한 오해와 진실

아돌프 럽하면 농구팬들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편견은 그가 백인우월주의자였고,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영화의 극적인 재미를 위해 조금 과장된 측면도 있다. 1960년대 중반은 흑인 인권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흑인 5명이 주전인 텍사스 웨스턴 대학이 조명을 받았고 반대로 상대팀이던 켄터키 대학은 악역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럽은 프리포트 고등학교 감독 시절 윌리엄 모슬리라는 흑인 선수를 학교 역사상 처음으로 농구 선수로 기용했다. 또한 SEC 역사상 첫 흑인 선수였던 페리 월러스는 럽이 장학금을 제의해 켄터키 대학에 입학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이 밴더빌트 대학을 택한 것이다. 

또한 당시 남부는 인종차별이 가장 극심했던 곳이었다. 따라서 독일계였던 럽은 영화의 구성상 악역으로 표현되기 위해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꼬리표를 달아야 했다. 

영화와 반대로 럽은 1970-1971시즌에 톰 페인이라는 213cm의 장신 흑인 선수를 리쿠르팅해 잘 써먹었다. 페인은 이후 2학년을 마치고 NBA 드래프트에 전체 2번으로 애틀랜타 호크스에 지명되기도 했다. 또한 럽은 1948년 올림픽 미국 대표팀 코치 시절 자신의 제자였던 그로자, 비어드, 존스, 롤린스 외에 미국 농구 대표팀 최초의 흑인 선수였던 돈 박스데일(당시 UCLA)를 선발하기도 했다. 영화 「글로리 로드」의 감독 제임스 가트너도 “나는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서는 어느 누구도 럽이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할 것이라 믿지 않는다”며 “나는 럽이 단순히 농구 경기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 영화에서 인종차별주의자로 그려지지 않았다”고 항변한 바 있다.

럽의 코칭 스타일이 강압적이고 독재자 스타일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럽이 재임 중이던 켄터키 대학의 훈련 모습 중 선수들이 내는 소리는 거친 숨소리뿐이었을 정도로 조용하고 엄숙했다. 반대로 럽은 선수들의 실수에 호통을 치고 가차 없이 심한 말을 퍼부었다. 하지만 그런 혹독한 훈련 덕에 켄터키 대학은 최강의 팀이 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럽에게 미신이 많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럽이 갈색 정장을 즐겨 입는 이유는 그 정장을 입었을 때 이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경기날 머리핀을 찾으면 행운의 징조라고 믿는 등 승부를 위한 다양한 미신과 불문율을 믿었다.

 

 

명언으로 본 아돌프 럽

1949년 NCAA 토너먼트 2연패를 달성한 후 기자들이 성공의 비결을 묻자 럽은 “간단하다. 코칭을 잘하면 된다”라고 응수한 적이 있다. 럽은 그만큼 자신감이 넘치는 감독이었고 수많은 명언들을 남겼다. 9월호 명장열전은 그의 명언들과 함께 마무리한다.

“나에게 수많은 적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가장 인기 많은 패장보다 가장 미움 받는 승장이 되고 싶다.”

“나에게 패배와 실패는 적이다. 승리가 없다면 농구는 의미가 없다. 나는 승부의 세계에 살지 못한다면 요람부터 무덤까지 살 이유가 없다.”

“공격이 풀리지 않는 날에는 수비가 구세주가 될 것이다.”

“백보드를 지배하는 자가 경기를 지배한다.”

“나는 좋은 수비는 7가지 기본 원칙이 있다고 믿는다. 첫째 상대팀의 슛 횟수를 줄여라. 둘째 상대가 낮은 확률의 샷을 던지게 만들어라. 셋째 모든 것은 18피트(약 5.5m) 이내에서 조율하라. 넷째 세컨드샷 기회를 차단하라. 다섯째 쉬운 득점을 주지마라. 여섯째 모든 장거리샷도 방해하라. 일곱째 피봇맨에게 들어가는 공을 차단하라.”

“코치라는 직업을 하기로 결심했다면 매년 발전해야 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 어느 코치도 자기만의 농구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 농구에는 아무런 비결도 없다. 유일한 비결이 있다면 그것은 견고한 기본기를 가르치는 것과 선수들을 다룰 수 있는 지식, 견고한 플레이 시스템, 선수들에게 승리하고자 하는 열망을 심어주는 능력뿐이다.

아돌프 럽 프로필

1901년 9월2일 캔사스州 할스테드에서 출생

1977년 12월10일 켄터키州 렝싱턴에서 사망

통산 876승190패(역대 4위), 승률 .822, 역대 2위

NCAA 토너먼트 우승 4회(1948, 49, 51, 58), 역대 3위

헴름 재단 선정 전미 챔피언 2회(1933, 1954)

프레모-포레타 선정 전미 챔피언 3회(1934, 1947, 1948)

파이널 4 진출 6회(1942, 48, 49, 51, 58, 66)

1946년 NIT 우승

SEC 우승 27회

1948년 올림픽 미국대표팀 어시스턴트 코치

SEC 올해의 감독 7회

NCAA 올해의 감독 5회

1969년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06년 대학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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