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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던·나이키 어떻게 지구를 삼켰나
- 출처:루키|2014-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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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황제‘ 마이클 조던이 NBA 코트를 수놓을 때마다 함박웃음 짓는 많은 기업들이 있었다. 조던의 수혜를 가장 크게 입은 업체가 있다면 단연 나이키다. 하지만 조던 역시 나이키의 덕을 많이 봤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조던은 어떻게 슈퍼스타를 넘어 글로벌 아이콘이 되었는가? 나이키는 어떻게 초국적 기업이 되었을까?
작지만 위대한 탄생
나이키는 1964년 필 나이트와 빌 바워먼이 세운 ‘블루 리본 스포츠‘라는 작은 구멍가게에서 시작했다. 나이트는 오레건 대학 시절 평범한 장거리 육상 선수였다. 그는 보다 좋은 육상화를 만들고자 했던 코치 바워먼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는 컨버스, 아디다스, 퓨마가 운동화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시기였다. 나이트는 이 흐름을 바꾸고 싶어했다. 그래서 일본 여행 도중 ‘타이거 육상화‘를 만들던 일본 고베의 한 신발 회사를 찾았다. 싸지만 좋은 기술로 만들어진 일본 육상화를 수입하여 판매하면 장사가 될 것으로 예상했던 것.
나이트는 바워먼과 함께 각각 500달러 씩 투자하여 일본에서 타이거 육상화를 잔뜩 샀다. 그리고 육상 대회를 돌며 운동화를 팔기 시작했다. 판매를 시작한 첫해, 1,000켤레에 육박하는 운동화를 팔아 순이익 364달러를 냈다. 아디다스 등 대기업에 비하면 정말 별 볼 일 없는 성과였지만 이것이 블루 리본 스포츠의 탄생이었다.
그 후 나이키는 점차 성장해나갔다. 어느 날, 바우먼은 녹인 고무를 와플 석쇠에 붓는 기발한 생각을 했다. 밑창에 와플 모양의 고무가 달린 가벼운 운동화의 발명이었다. 그는 육상 선수들에게 이 신발을 신긴 후 달려보게 했다. 선수들의 반응은 아주 좋았다. 나이트와 바워먼은 이 운동화 제작에 집중하기로 했다.
새 운동화 제작에 맞는 새로운 상표가 필요했다. 블루 리본 스포츠의 디자이너 제프 존슨은 승리의 여신 ‘니케(Nike)‘의 꿈을 꾸었다. 나이트는 이 이름을 미국식으로 발음한 ‘나이키(Nike)‘를 상표로 등록했다.
나이트는 포틀랜드 주립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던 캐롤린 데이빗슨에게 로고를 의뢰했다. 데이빗슨은 니케의 날개를 상징하는 ‘Swoosh‘ 로고를 그렸다. 나이트는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35달러를 주고 로고를 샀다.
하늘이 도왔을까. 운도 따랐다. 1970년대 말, 미국에 조깅 열풍이 불었다. 미국인들은 너도나도 나이키를 신었다. 사람들이 뛰어난 기술과 훌륭한 품질을 갖춘 나이키를 육상화로 선호하게 된 것이었다. 나이키의 매출은 순식간에 2억 7,000만 달러까지 늘어났다.
위기를 기회로
나이키는 당시만 해도 큰 광고를 많이 하지 않았다. 나이트가 광고를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광고가 돈 낭비라고 생각했다. "상품의 성공은 광고 같은 허위 장치가 아니라 품질과 사용자의 성공에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지는 생각이었다. 그 사이 경쟁업체 아디다스와 리복은 적극적인 광고 유치를 통해 엄청난 매출을 올리고 있었다. 특히 리복은 미지의 세계였던 에어로빅 시장에 뛰어들어 완벽히 장악,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순식간에 매출이 4배 이상 뛰며 당대 최고의 스포츠 브랜드로 급부상했다.
반면, 나이키는 매출이 80%나 감소하는 등 점점 주가가 곤두박질 치고 있었다. 이에 나이트, 그리고 나이키는 광고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됐다.
당시 농구계에는 ‘마이클 조던‘이라는 유망주가 급부상하고 있었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1학년 때부터 이미 전국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오던 선수였다. 1984년 조던은 대학을 3년만 마치고 프로의 세계로 뛰어들었고, NBA 드래프트 전체 3순위로 시카고 불스에 입단했다.
조던의 에이전트 데이비드 포크는 일찌감치 이쪽 방면으로 머리가 깨어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뛰어난 운동선수가 시장에 뛰어들면 큰 매출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포크는 조던과 나이키의 계약을 추진했다.
조던은 나이키와 나이트가 찾던 인물이기도 했다. 공중을 나는 듯한 화려한 플레이, 압도적인 운동능력, 코트 위에서 뿜어내는 카리스마, 완벽한 기량까지 보유한 조던은 나이키에게 있어서 최적의 광고 모델이었다. 나이키와 조던은 이렇게 계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이 계약은 훗날 기업과 개인 간에 맺은 ‘역대 최고의 계약 사례‘가 됐다.
마이클 조던이 된 마이클 조던
조던은 데뷔 시즌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1984-85시즌 경기당 28.2점으로 평균 득점 3위에 올랐다. 또, 2313점을 올려 총 득점 1위에 올랐다. 신인이었음을 감안한다면 기량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감이 올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6.5리바운드, 5.9어시스트, 야투 성공률 51.5%, 2.4스틸(리그 4위)도 겸했다.
이에 나이키는 로고 모양처럼 입이 찢어지게 웃을 수 있었다. 조던의 엄청난 활약 덕에 나이키의 매출이 껑충 뛰었던 것이다. ‘에어 조던‘ 브랜드는 1985년 등장 첫해에만 1억 3,0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조던 효과‘에 힘입은 나이키의 연간 매출은 10억 달러를 넘겨버렸다. 1년만의 대역전극이었다. 추락하던 나이키가 다시 폭발적인 성장세를 일으키며 반전을 일으킨 것이었다.
조던 개인적으로도 엄청난 발전을 거듭했다. 단순히 개인기량이 뛰어난 선수를 넘어 리그 MVP가 됐다. 조던의 명성에 비하면 득점왕, 슬램덩크 챔피언, 올해의 수비수 등은 그저 덤이었다. 조던은 어느새 한 스포츠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NBA는 1980년대 들어 미국 내에서 서서히 인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매직 존슨과 래리 버드의 라이벌리를 필두로 한 마케팅이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조던은 이렇게 불붙은 인기에 기름을 끼얹었다. 조던이 등장한 이후 NBA는 최고 인기 스포츠로 부상했다. 특정 국가의 단일 스포츠가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는 것은 전례가 없는 사건이었다. 조던은 스포츠를 넘어 글로벌 문화 아이콘으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나이키는 조던과 함께 더욱 몸집을 키워나갔다.
당시 경제 전문가들은 조던으로부터 파생되는 미국의 경제적 효과가 한화 약 13조 원에 이른다고 추산한 바 있다 = ⓒ 나이키
최고의 광고 모델
조던은 나이키 외에도 수많은 기업과 계약을 맺었다. 오클리 선글라스, 게토레이, 윌슨 스포츠, 위티스 등 등 대단히 많은 사업체의 광고 모델로 활동했다. 나이트는 이러한 조던을 가리켜 "마이클 조던은 20세기 최고의 광고 협찬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조던과 나이키의 폭풍 성장에는 텔레비전과 미디어의 발달 또한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들이 만든 광고가 전 세계로 전파되는 데에는 매스컴의 힘이 컸다. 조던의 광고는 텔레비전을 통해 전 세계로 송출되었다. 과거 지면광고로 일관하던 나이키는 어느새 세계 최고로 뛰어난 영상광고를 자랑하는 기업이 됐다.
1985년 조던과 나이키의 첫 ‘에어 조던‘ 광고는 굉장히 큰 성공을 거두었다. 조던은 하늘을 붕 날아 덩크를 꽂은 뒤, "누가 인간이 날 수 없대?"라는 대사를 날렸다. 1986년에는 유명 영화감독 스파이크 리와 조던이 함께 찍은 광고가 초대박이 났다. 이 광고는 1980년대 가장 인기 있던 광고 중 한 편으로 꼽힌다.
나이키는 당대 최고의 악동 캐릭터를 지녔던 찰스 바클리를 영입했다. 만인의 역할모델이었던 조던과의 대비효과를 노리기 위해서였다. 조던은 언제나 바른 말을 하며 유머러스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모두의 역할모델로 제격이었다. 반면, 바클리는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다. 또, 코트 안팎에서 악동 기질을 뿜어대는 선수였다. 이러한 두 광고모델의 기용은 뚜렷한 대비효과를 가져왔다. 나이키는 이러한 방법으로 두 모델의 특성과 제품을 더욱 부각시킬 수 있었다.
시련의 나이키, 우뚝 선 조던
나이키는 1990년대 중반 이후 큰 위기에 빠졌다. 매출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기업의 성장에 고무된 나이트가 여기 저기 판을 벌인 탓이었다. 나이키를 모든 스포츠업계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회사로 만들려는 심산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이키 운동화가 유행에서 벗어날 것은 예측하지 못했다. 평론가들은 "나이트가 시장을 지배하려는 욕심에 과욕을 부렸다"고 지적했다.
이때부터 서서히 나이키를 향한 비판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나이키는 여자 스포츠에 관심을 쏟았으나 정작 여성단체의 강도 높은 비난을 받았다. "미국의 여성들은 운동을 잘하기 위해 나이키를 신지만, 신발을 만드는 인도네시아, 베트남, 중국 여성들은 저임금, 신체적 학대, 강제적 초과 노동, 성희롱 등으로 고통받는다"는 이유에서였다.
나이키는 1998년 브라질 국가대표팀의 메인 스폰서였다. 하지만 브라질은 우승컵을 들어올리지 못했다. 브라질 축구의 전설, 펠레는 "나이키의 돈이 브라질 축구를 망치고 있다"고 쓴소리를 내뱉기에 이르렀다.
나이키가 받았던 비판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1) 운동선수와 팀을 돈으로 사려고 한다
2) 제작 단가를 낮추기 위해 아시아 노동력을 착취한다
1996년 인도네시아의 한 나이키 공장 이야기는 가관이었다. 약 25,000명에 이르는 노동자는 하루에 2달러가 조금 넘는 돈을 받을 뿐이었다. 또, 초과노동을 강요당했으며 폭행을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베트남의 나이키 공장 역시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에 따라 논란이 점점 거세졌다. 나이키의 매출은 급격히 떨어져갔다. 그런데 유독 ‘조던 브랜드‘만 57%의 놀라운 매출상승을 보였다. 신기한 일이었다. ‘인간‘ 조던이 나이키라는 ‘기업‘을 뛰어넘은 것이다. 나이키는 조던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매출이 떨어지고 있던 그들에게 조던은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파노플리 효과
이후 이야기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조던과 나이키가 계약을 맺은 것은 단연 탁월했다. 조던은 신격화 되는 스포츠 선수가 되었다. 나이키는 이제 스포츠 브랜드를 넘어 하나의 제국이라 칭해지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나이키는 조던을 철저하게 상품화했다. 그가 코트 위에서 만들어내는 어떠한 장면도 놓치지 않았다. 조던의 모든 것을 철저히 상업적으로 활용했다. 소위 말해 돈이 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청소년들은 조던을 닮고 싶어 했다. 농구할 때 조던처럼 혀를 내밀었고, 조던처럼 행동하려 애썼다. 에어조던을 신기 위해 범죄도 서슴없이 저질렀다. 이러한 일들은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대두되었다.
이는 ‘파노플리 효과‘라는 경제학 용어로 설명할 수 있다. 파노플리 효과는 "어떤 물건을 사면서 특정 집단에 속한다는 환상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저자로 유명한 서울대의 김난도 교수는 "우리가 자동차 게임을 하면 진짜 드라이버가 된 듯한 기분이 들잖아요. 똑같은 원리로 유명 브랜드 커피를 마시면 영화 속 주인공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런 것을 파노플리 효과라고 합니다"라고 설명한 바 있다.
파노플리 효과는 그간 ‘된장녀‘라는 신조어를 설명할 때 많이 인용 되곤 했다. ‘있어 보이고 싶어 하는‘ 인간의 허영심이 만들어낸 현상이라는 것이다.
나이키는 이를 정확히 꿰뚫어보았다. 그래서 그 부분을 철저히 연구, 기획하여 마케팅으로 활용했다. 조던을 비롯해 최고의 스포츠 스타들을 광고 전면에 내세웠다. 그들의 하이라이트를 보여주고 그들이 나이키 옷과 신발을 신는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전 세계의 스포츠 팬들은 이에 매료되었다. 이는 나이키의 놀라운 성장으로 이어졌다.
사람들은 단순하게 신발과 옷을 산 것이 아니었다. 나이키 제품을 구매하는 것은 곧, 자신들이 동경하는 스포츠 스타의 업적, 화려함, 플레이, 인생 등을 공유하는 행위로 받아 들여졌다. 비싼 제품 가격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그 선수가 된 듯한 느낌을 받는 것, 중요한 것은 그것이었다.
P.S. Like Mike
‘조던 효과‘는 나이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음료업계 또한 조던 덕분에 어마어마한 매출을 기록했다. 조던은 코카콜라와 게토레이의 모델로도 활동한 바 있다. 게토레이는 "Be Like Mike"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광고를 진행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게토레이는 한 해 10억 달러에 육박하는 폭발적 매출을 올렸다. 1998년 게토레이의 매출액은 15억 달러로 뛰었다. 농구황제 조던이 마지막으로 빛을 발하던 시기였다. 게토레이는 스포츠 음료 시장의 80%에 이르는 엄청난 점유율을 확보했다.
※ 참고문헌
월터 레이피버, 『마이클 조던, 나이키, 지구 자본주의』, 문학과 지성사, 1999
허원무, 『마이클 조던이 나이키를 살렸다』, 살림,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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