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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과천선'의 표본, 잭 랜돌프 스토리
출처:점프볼|2013-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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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 올스타 파워포워드 잭 랜돌프.

단언컨데 짧은 시간동안 선수의 캐릭터가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변한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WWE 프로레슬링의 예를 빌리자면 ‘악역‘이 ‘선역‘이 된 케이스인데, 그동안 몇 번의 실수로 인해 선역이 악역으로 턴힐한 선수들은 있었어도 ‘비호감‘ 선수가 ‘호감‘형이 된 사례는 그리 많지 않았다.

2009년 멤피스 그리즐리스 합류 후 전혀 다른 선수가 된 듯한 랜돌프는 그 흔치 않은 사례의 주인공이 됐다.
몇 년 전만 해도 랜돌프는 NBA를 대표하는 문제아였다. 처음에는 코트 밖에서만 말을 안 듣더니 어느 샌가 코트 위에서도 감독 말을 잘 안 듣는 선수가 됐다. 그래서 한 외신기자는 랜돌프를 ‘problem child‘라 불렀다. 심지어 랜돌프가 포틀랜드 블레이저스를 떠나게 됐을 때 신문에서는 랜돌프의 이름 앞에 ‘lockeroom disruptor(라커룸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드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 랜돌프를 그런 식으로 평가하는 매체는 없다. USA 투데이를 비롯한 유수 언론은 ‘멤피스의 리더‘라는 수식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랜돌프 본인도 자신이 부진한 경기에서는 꼭 "동료들에게 미안하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 종교라도 바꾼 것일까? 아니면 진짜 각본이라도 있는 걸까? 랜돌프의 캐릭터가 바뀐 이유는 무엇일까?

재능만은 특별해

랜돌프는 인디애나주 메리언 출신이다. 그는 2학년 때 소속팀 메리언 고등학교를 주 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던 대스타였다.

같은 지역 라이벌 자레드 제프리스(Jared Jeffries, 블루밍턴 고교) 정도만이 랜돌프의 아성에 도전했을 뿐, 인사이드에서는 적수가 없었다.

그러나 2000년 인디애나주의 미스터 바스켓볼 투표에서는 제프리스가 랜돌프를 제쳤다. 가장 큰 이유는 코트 밖 행실 때문이었다(랜돌프는 고등학생 때 이미 경범죄로 인해 법원으로부터 거리청소 30일을 명령받기도 했다).

투표권을 가진 인디애나주 관계자들은 랜돌프보다는 순한 제프리스를 좋아했다. 뉴욕 타임즈를 통해 알려진 바에 따르면 제프리스는 인디애나 대학에 진학하면서 주(州)에 남은 반면, 랜돌프는 미시건 주립대학에 진학했는데, 이 과정에서 미운털이 박힌 점도 있었다고 한다.

실력 외적으로 랜돌프는 그리 사랑을 받지 못했다. 코트 밖 행실 때문에 자체 징계를 받았던 적도 있다. 그러나 미시건 주립대학 진학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만한 실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시건 주립대학에서 그는 제이슨 리차드슨, 찰리 벨과 발맞춰 맹활약했다. 1학년 성적은 33경기 출전에 10.8득점 6.7리바운드.

1시즌 전, 마틴 클리브스와 모리스 피터슨 등을 앞세워 전미 우승을 차지했던 스파르탄스(학교 애칭)도 랜돌프 덕분에 다시 한 번 NCAA 토너먼트 파이널 포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는 1학년임에도 불구하고 승부처마다 귀중한 리바운드와 골밑 공격을 해주면서 주가를 높였다.

하지만 전년도처럼 우승을 거머쥐진 못했다. 4강 상대 애리조나 대학의 막판 기세가 무서웠다. 제이슨 리차드슨과 제이슨 가드너가 활약한 애리조나 대학은 후반 막판에 미시건 주립대의 외곽을 틀어막으면서 80-61로 승리했다. 이 경기에서 랜돌프는 12점을 기록했다.

USA 투데이와 CNN 등 유수언론들은 비록 4강에서 졌지만 미시건 주립대의 미래는 밝을 것이라 전망했다. 랜돌프가 보여준 가능성 덕분이었다.

하지만 랜돌프는 대학에 남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2001년 NBA 드래프트 진출을 결정한 것이다. 탐 이조 감독은 무척 아쉬워 했다는 후문이다. 그는 랜돌프의 결정에 유감을 표하기보다 선수들이 고등학교를 마치고, 혹은 대학교 1학년만 마치고 바로 프로에 뛰어드는 경향 자체에 대해 속상하다는 속내를 전했다. "지속 가능한 발전이 어렵게 되고 있다. 선수들도 학교에 오래 남아있는 것이 뒤쳐지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며 말이다.

그 해 드래프트에서 랜돌프는 19순위로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에 지명됐다. 포틀랜드는 "19순위로 지명할 수 있는 최적의 선택"이라고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정작 랜돌프는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고 한다.

"드래프트 결과가 정치적인 것 같다. (드래프트 워크아웃 당시) 내 앞에서 힘도 못 쓰던 선수들이 나보다 앞순위에 지명됐다. 특히 상위 5순위에 지명된 선수들은 더더욱 그렇다. 최고의 선수들이 드래프트 상위에 지명된 것 같지 않다."

실제로 2001년 드래프트는 논란이 많이 있었던 드래프트였다. 마이클 조던이 사장으로 있던 워싱턴 위저즈는 고졸 선수 콰미 브라운을 전체 1순위로 지명했고, 그 외 로터리 지명에는 3명의 고교생이 추가로 선발됐다. 대학 4학년을 마치고 나오는 것이 이상한 분위기였다.



무서운 성장세

랜돌프의 장점은 포스트에서 발휘된다. 이미 대학시절부터 체격은 완성형이었다. 육중한 몸과 엄청난 힘, 그리고 큰 손과 발놀림을 앞세워 상대를 괴롭혔다. 양손을 모두 사용할 수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었다. ESPN은 ‘클래식 포스트업 플레이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리바운드에 대한 집념도 뛰어났다. 비록 수비력은 공격에 비해 떨어졌지만, NBA에서 경험을 쌓는다면 충분히 좋은 선수가 될 것이란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사실 첫 시즌(2001-2002시즌)은 기회가 충분치 않았다. 라쉬드 월러스, 데일 데이비스, 숀 켐프 등이 버티고 있었기에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자주 기용되진 않았지만 크리스 더들리와 루벤 붐췌붐췌조차도 랜돌프보다는 출전시간이 길었다. 랜돌프의 루키 시즌 성적은 5.8분 출전에 2.8득점 1.7리바운드.

2002-2003시즌 들어 랜돌프의 정규시즌 출전시간은 16.9분으로 늘어난다. 그러나 그의 진짜 가능성을 본 무대는 바로 플레이오프였다. 댈러스 매버릭스와의 1라운드 시리즈에서 29.3분을 뛰며 13.9득점 8.7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팀을 이끈 것.

당시 포틀랜드는 부상자가 워낙 많고, 모리스 칙스 감독 경질설까지 나돌아 팀 운영이 제대로 안 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시리즈를 0승 3패로 시작해 분위기가 어두웠다.

그러나 이후 거짓말처럼 4,5,6차전을 차례로 이기면서 시리즈를 7차전까지 몰고 갔다. NBA 플레이오프 역사상 0승 3패로 시작한 팀이 시리즈를 뒤집은 사례는 없었다. 7차전까지 몰고간 것만 해도 역사상 3번 밖에 없었던 일이었다.

그 중심에는 주전으로 깜짝 발탁된 랜돌프가 있었다. 4차전에 무려 41분을 뛰면서 25득점 15리바운드를 기록했다. 팀의 가장 중요한 무대에서 NBA 데뷔 후 가장 많은 시간을 뛰며 그 기대에 부응했던 것. 랜돌프는 4~6차전 동안 계속해서 20+득점을 올리면서 팀 승리를 견인했다(랜돌프의 활약 옆에는 무릎 통증에서 돌아온 스카티 피펜의 존재감도 한몫했다).

비록 7차전에서는 14점(5-OF-12 FG)으로 부진했지만, 베테랑들의 실망스러운 플레이에 지쳤던 포틀랜드 팬들은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실, 랜돌프 입장에서는 아주 극적인 반전이었다. 이 일이 있기 전까지 랜돌프도 포틀랜드 팬들에게 욕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2년차임에도 불구하고 연습 도중에 루번 패터슨에게 주먹을 날려 2경기 징계와 함께 10만 달러 벌금을 내야 했다. 계속되는 사건사고로 인해 포틀랜드 팬들은 팀을 ‘Jail Blazers‘라 부르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홈경기 보이콧 이야기도 나왔다. 보스턴의 명칼럼니스트, 피터 메이 기자에 따르면 "당시 포틀랜드 홍보담당자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었다"라고 회고한다.)

어쨌든 랜돌프는 비난 여론을 코트 위에서 조금이나마 잠재울 수 있었다. 마침 자신의 출장시간이 늘고, 자신을 위주로한 패턴 플레이가 1~2개씩 생기면서 자신감도 올라오던 시점이었다. 랜돌프 본인도 2003년 플레이오프 시리즈가 자신의 농구 인생을 바꿨다고 말할 정도다.

그 자신감이 정점에 오른 것이 바로 2003-2004시즌이었다. 이 시즌에 랜돌프는 카를로스 부저와 경합 끝에 기량발전상(Most Improved Player Award)을 품었다. 그는 전 시즌 8.4점에서 무려 12점 가까이 오른 20.1득점을 기록했다. 리바운드 역시 두 배(4.5개-> 10.5개)가 넘는 수치를 만들어냈다. 출전시간이 늘어난 덕분이긴 하지만, 그 기대에 걸맞게 더블팀을 유발하는 선수로 올라섰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하지만 랜돌프의 성장이 갑작스러운 기회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랜돌프는 이미 2번째 시즌을 앞두고 치른 서머리그에서 MVP가 되는 등 비시즌에도 노력을 많이 기울여왔다. 피펜과 월러스 등 선배들도 "의지가 대단한 선수"라고 평가했다. 랜돌프는 코트 밖 사생활과 달리 경기력 유지를 위한 노력만큼은 시간을 아끼지 않는 타입이었다. 오프시즌 동안 그는 수구(水球)를 가장 즐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그의 노력에는 인종차별이 심했던 지역에서 자라면서 겪은 설움이 영향을 줬다고 한다. 지난 시즌 중 한 TV쇼에 출연했을 때는 "난 평생 언더독(underdog)으로 살아왔다"라며 성공의 비결을 말하기도 했다.

그 노력은 ‘경쟁심‘과 ‘집중력‘으로 나타났다. 2003-2004시즌 인디애나 페이서스와의 경기에서는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34점 9리바운드로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전날 자동차에서 마리화나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나온 상태였다. 그러나 코트 위에서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며 팬들에게 사과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부상, 그리고…….

사실, 자신이 응원하는 팀에 지명된 어린 선수가 기량을 키워가며 팀을 승리로 이끌고, 또 잘못을 뉘우치면서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은 참 보기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도 1~2번일 때 이야기다. 어쩌다 한번이면 필자가 위에서 ‘과장‘해서 썼듯, 경찰서에서 밤새 조사받고 나와서 경기를 승리로 이끈 것을 미화시킬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랜돌프의 가장 큰 문제점은 경찰서에 드나들고 가쉽란에 이름이 오르내린 것이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처음‘도 아니었을 뿐더러, ‘마지막‘도 아니었다는 것에 있다.

랜돌프는 2004년 MIP 수상과 함께 미래를 보장받는다. 구단은 그에게 계약기간 6년에 8,400만 달러에 달하는 거대 계약을 제시했다. 말 그대로 인생 역전을 이루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후부터 랜돌프는 ‘달라졌다‘는 말을 자주 들어야 했다. ‘스타급‘으로 위상이 달라졌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전과 다르게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자주 나돌았던 것이다.

다음은 랜돌프가 주전급으로 자리 잡은 후 언론을 통해 보도됐던 그의 사건 일지다.

- 훈련 중 동료와 주먹다짐(루번 패터슨)
- 과속 및 난폭 운전(후 마리화나 적발)
- 마리화나 소지혐의
- 마리화나 흡입 상태에서 운전
- 호텔 방에서 성추행
- 스트립클럽 외상값 지불 지연

데니스 로드맨처럼 사고를 쳐도 팀이 이기고, 개인성적도 좋다면 어느 정도 덮힐 지도 모른다. 그러나 포틀랜드는 2005-2006시즌에 21승, 2006-2007시즌에 32승에 그쳤다. NBA에서 가장 어린 편에 속하는 리빌딩 팀이었다고는 해도 아쉬운 결과였다.

또, 당시 팀을 이끌었던 네이트 맥밀란 감독은 ‘범죄자 팀‘이란 오명을 씻고 어린 선수 위주로 새 출발하는 팀에서 랜돌프가 리더 역할을 해주길 바랐으나, 이 마저도 안 된 것에 대해 많이 아쉬워했다는 후문이다.

플레이에서도 마찬가지다. 랜돌프가 막 주전으로 올라설 무렵, 한국에서는 하승진이 NBA 포틀랜드에 진출해 화제가 되고 있었다.

덕분에 국내에서도 ‘수퍼액션‘ 채널을 통해 포틀랜드 경기를 자주 중계했다. 당시 필자와 트윈 해설을 맡았던 최인선 전 감독은 랜돌프에 대해 "저 좋은 몸을 갖고 인사이드를 외면하는 것이 아쉽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실제로 랜돌프는 무릎 부상 이후 몸싸움이나 인사이드 득점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여준 바 있다. 2006-2007시즌에는 커리어-하이 23.6득점을 기록했으나, 올스타에 뽑히거나 자신에 대한 평가를 바꿀 정도는 아니었다.

바닥까지 떨어지다

참다못한 포틀랜드는 2007년 6월, 랜돌프를 포기하고 만다.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의미였다. 포틀랜드는 댄 디카우, 프레드 존스와 함께 그를 뉴욕 닉스로 보내고, 스티브 프랜시스와 채닝 프라이, 2008년 드래프트 2라운드 지명권을 받았다. 랜돌프는 "이기는 팀을 만들어 플레이오프에 나가보고 싶다"라고 각오를 밝혔다. 그는 "다 어릴 때 실수였다.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새 출발하겠다"라고 덧붙였다.

당시 뉴욕 닉스는 형편없는 성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2004년 플레이오프 이후 한 번도 포스트시즌 무대를 밟지 못했다. 팀 단장을 맡고 있던 아이재아 토마스는 랜돌프와 저말 크로포드, 데이비드 리, 스테판 마베리, 윌슨 챈들러 정도의 조합이라면 충분히 플레이오프도 가능하다고 봤다.

그러나 이름값은 훌륭했지만, 구성원들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2007-2008시즌 닉스 성적은 겨우 23승 59패. ‘조직력‘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민망한 경기력을 보였다.

랜돌프는 17.6득점 10.3리바운드로 보이는 숫자에서는 ‘기본‘은 해줬지만, 수비와 공격 공헌도 부문에서는 영 꽝이었다. 무리한 중거리슛도 잦았고, 포스트업에서 뭔가를 연결시키려는 노력도 부족했다. 실제로 닉스는 NBA 30개 구단 중 어시스트가 가장 적었다. ("단장들은 자신의 선택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대다수 실패한 단장들은 최고의 시나리오만 생각하기 때문에 나중에는 안 좋은 결과를 맞게 된다. 토마스도 그랬다. 만약 랜돌프와 에디 커리가 최상의 마인드, 최고의 몸 상태로 경기에 임했다면 뉴욕은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팀 동료들과도 사이가 안 좋았다. 스스로도 초창기의 마인드를 잃은 듯 체중관리도 열심히 하지 않았다. 함께 이적해온 프레드 존스는 "새로운 환경에서 시작한다면 아마 랜돌프도 달라질 것이다. 포틀랜드에서는 사생활이 과하게 드러난 면이 없지 않아 있다"라고 변호해줬지만, 평가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결국 그는 1년 여만에 팀을 떠나게 됐다. 클리퍼스에서 보낸 39경기는 말 그대로 무미건조했다. 20.9득점과 9.4리바운드는 큰 의미가 없었다. 2008-2009시즌 클리퍼스는 19승 63패에 그쳤고, 랜돌프가 와서 크게 달라진 점도 없었으니 말이다.



단장님~ 개과천선해서 많이 당황하셨죠?

랜돌프의 실망스러운 모습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었으나, 그 중에서도 주변에 ‘어른‘이 없다는 의견이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를테면 "너의 지금 행동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지적해줄 만한 선배나 어른이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잭 랜돌프에게는 4형제가 있었으나, 아버지가 없어 어머니 밑에서 가난과 싸워가며 성장기를 겪었다. 정부 지원 없이는 생계가 어려운 수준이었다.

NBA에 데뷔한 뒤에도 주변에 사보니스와 피펜 같이 농구적으로 이룬 것이 많은 선배들이 많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워낙 안 좋다보니 여기서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이 아니냐는 말도 있었다.

랜돌프의 주변에는 나쁜 친구들이 많았다. 인디애나주 코카인 공급책으로 오해를 받았을 정도니 말 다했다. 그러나 랜돌프의 사건일지를 보면 ‘혐의‘를 받긴 했는데, 그것이 인정되지 않은 케이스도 있었다.

랜돌프가 자신의 인생을 말할 때 유독 ‘언더독‘이란 말을 자주 쓴 이유도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과거 ESPN 및 SLAM과의 인터뷰에서 랜돌프는 "난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경찰이 불러 세운 적도 있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이런 일종의 피해 의식도 그가 제대로 된 팀 생활을 하는데 방해가 된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2009-2010시즌을 기점으로 랜돌프에 대한 평가나 기사 논조는 180도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가 멤피스 그리즐리스에 합류한 시점이다.

사실, 필자는 그가 멤피스에 갈 때도 그리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같은 시기에 앨런 아이버슨도 멤피스에 합류했는데, 파생 효과보다는 라커룸 분위기가 더 안 좋아질 것이라 봤다. 실제로 아이버슨은 단 3경기 만에 멤피스 유니폼을 벗어 던졌다.

그러나 랜돌프는 꿋꿋했다. 2009-2010시즌 성적은 20.8득점과 11.7리바운드. MIP를 수상했던 2003-2004시즌 이후 가장 많은 37.7분을 소화하면서 멤피스를 플레이오프 직전까지 올려놨다. (전 시즌 24승에 그쳤던 멤피스는 2009-2010시즌에 40승을 거두며 서부 10위를 차지했다.)

문제는커녕 여러 면에서 솔선수범하면서 지역 스타로 거듭났다. 봉사활동도 활발했다. NBA 및 구단 공식 행사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불우아동 돕기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돈도 화끈하게 썼다. 그러면서 순식간에 화제의 중심이 됐다.

뉴욕 타임즈는 고교시절 그의 지도자였던 모 스메들리(Moe Smedley) 감독의 말을 빌려 그 원인을 분석했다. 당시 스메들리 감독은 "잭이 마침내 자신에게 맞는 팀을 찾은 것 같다. 사실 이 친구를 보면 느리기도 하고, 점프력도 그리 좋지 않다. 하지만 기회를 주면 늘 어떻게든 승리에 공헌하려고 노력하는 선수다"라고 말했다.

다른 한 편으로는 랜돌프가 서른에 접어들고, 아이가 10대가 되면서 더 성숙해졌다는 시각도 있다. 랜돌프는 한 사이트와의 인터뷰에서 "10대 시절은 아버지의 역할이 중요하다. 내게는 ‘잭, 이런 건 하면 안 돼!‘,‘성적표는 어디 있어?‘라고 말해주는 아버지가 없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멤피스는 우려와 달리 사건사고없이 쾌속 성장했다. 덕분에 랜돌프는 2010년에 생애 첫 NBA 올스타가 되는 영예를 안았다. 소속팀도 2010-2011시즌에 플레이오프에 올랐으며, 랜돌프는 그 일등공신으로 인정받아 계약기간 4년에 총금액 7,100만 달러를 품에 안는 기쁨을 누렸다.

멤피스는 2011년 플레이오프에서 8번 시드로 올랐지만 1번 시드 샌안토니오 스퍼스를 4승 2패로 꺾는 기염을 토했다. 이는 ‘그리즐리스‘라는 농구팀이 창단한 후 플레이오프에서 거둔 첫 시리즈 승리이기도 했다. 이 역사적인 6차전 경기에서 랜돌프는 31득점 11리바운드를 기록했다. 그는 4쿼터에서만 17득점을 폭발시키며 분투했다. 그는 이 기세를 몰아 오클라호마 시티 썬더와 가진 서부 컨퍼런스 2라운드 1차전에서도 34득점(플레이오프 커리어-하이)으로 활약, 팀을 승리(114-101)로 이끌었다.

랜돌프는 틈날 때마다 동료들의 분전을 촉구하며 리더다운 모습을 보여줬다. "우리는 믿는다. 그리고 믿어야 한다"라며 말이다. 그리고 이를 행동으로 옮겼다. 리오넬 홀린스 전 감독은 "랜돌프는 우리 팀 최고의 전투마(馬)다"라며 찬사를 보냈다.

2번(3차전, 4차전)이나 연장에 가는 접전과 명승부를 펼친 멤피스와 랜돌프. 그러나 이들은 케빈 듀란트와 러셀 웨스트브룩을 막지 못한 채 결국 7차전 끝에 시즌을 접어야 했다.

비록 패했지만 랜돌프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케빈 듀란트는 랜돌프에 대해 "NBA 최고의 파워포워드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상대팀의 스캇 브룩스 감독은 "랜돌프 수비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나도 우리 팀에서는 어떤 수비를 해야 랜돌프를 막을 수 있을 지 연구를 많이 했다. 하지만 그를 혼자 막기란 쉽지가 않았다"라고 말했다.

일부 단장들은 그런 랜돌프의 모습을 보면서 "당황스럽다"라고도 말했다. 특히 밀워키 벅스 내부에서 동요가 심했다. 이유인즉, 멤피스가 랜돌프를 영입하기 전에 먼저 눈독을 들였던 팀이 밀워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단주였던 허브 콜은 ‘이기적인 선수‘라며 랜돌프에 대한 결제를 반대했다.

직설적이기로 유명한 다임(Dime) 매거진은 "다큐멘터리라도 하나 만들어줘야 한다"고 썼다.

2011-2012시즌 부상으로 다소 주춤했던 랜돌프는 2012-2013시즌, 다시 한 번 의기투합하여 팀을 포스트시즌의 중심에 올려놓는다. 생산력이 과거에 비해 떨어졌지만, 로우포스트에서 그는 여전히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떨어지는 수비는 외곽의 알렌과 인사이드의 마크 가솔이 커버했다. 덕분에 소속팀은 서부 컨퍼런스 결승에 오르는 역사적인 순간을 맞기도 했다. 비록 샌안토니오 스퍼스에 의해 무기력하게 무너지고 말았지만 2번이나 연장전까지 가면서 물고 늘어지는 저력도 보였다. (시리즈에 앞서 그렉 포포비치 스퍼스 감독은 "랜돌프와 가솔이 뭉치면 정말 위력적이다. 정신무장을 단단히 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는 후문이다.)



랜돌프와 멤피스의 미래는?

사실 랜돌프는 여전히 크고작은 사건에 휘말리고 있다. 정확히 따지면 ‘혐의‘를 받는 사건도 있다. 그러나 예전처럼 이로 인해 구설수에 오르는 일은 줄었다. 이러면서 랜돌프의 잘 알려지지 않았던 면도 공개되고 있다. 이를테면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고양이를 무서워한다던가, 종종 농구경기를 42분으로 착각(NBA는 48분)한다던가 하는 소소한 에피소드 말이다.

우울한 소식만 전해지던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랜돌프의 계약은 2014-2015시즌까지 맺어진 상황이다. 멤피스도 현 전력으로 계속해서 서부 컨퍼런스 정상에 오를 각오다. 감독이 교체되는 그림이 매끄럽진 못했지만, 기존 핵심을 품고 있는데다 FA 시장에서 마이크 밀러까지 건져 든든하다.

2009년 이전, 즉 멤피스에 가세하기 전만해도 랜돌프의 커리어는 암흑기였다. 체중관리도 잘 안 되던 시기도 있었다. 부상도 쉽게 찾아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책임감‘이란 단어를 가슴에 새긴 지금은 다르다. 최근에도 그는 멤피스 지역 체육센터에서 몸 관리에 열중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비시즌마다 꾸준하게 찾은 덕분에 팬들도 시간을 맞춰 기다리고 있을 정도.

랜돌프는 멤피스 지역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멤피스에서 우승과 함께 커리어를 마치고 싶다"라는 소망도 드러냈다.

"그리즐리스 선수로서 은퇴하고 싶다. 이곳은 나의 홈이다. 이곳에서 집도 샀고, 내 아이들도 학교를 다니고 있다. 그들이 트레이드를 하더라도, 나는 이곳에서 살 것이다."

"난 더 이상 불평할 수가 없다"라고 말하는 랜돌프. 그리즐리스가 ‘강팀‘이자 팬들에게 사랑받는 팀으로 변모한 가운데는 이렇듯, 180도 달라진 랜돌프의 활약이 있었다. (2009-2010시즌에 평균 13,000명 수준이었던 그리즐리스의 평균 관중은 현재 17,000명 가까이 올라왔다. 점유율로 따지면 91.8%까지 채워진 셈이다.)

과연 이런 랜돌프의 활약이 지속되어 멤피스가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을 지, 그리고 그들의 염원인 프랜차이즈 우승으로 이어질 수 있을 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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